2023. 12. 24., 본가.

오롯이 전달되어 한결 따뜻한

교향곡 제5번

현관에서 눈을 떴습니다. 왜 거기서 잤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채 풀지 못한 짐들이 점령한 침대에 대한 주취자의 창조적 답변이지 않았을까요.

생일이었지만 특별한 일정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할 일들이 여전히 꽤 있었거든요. 이종병렬컴퓨팅 프로젝트 최종 보고서도 제출해야 했고, 수많은 짐을 풀고 정리해야 했습니다.

최종 보고서를 완성하는 일은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연말에 마음편히 놀고 싶었던 베타가 미리미리 많은 부분들을 써뒀거든요. 과거의 저에게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짐을 푸는건 과거의 베타가 할 수 없었어요. 아니 애초에 3일 동안 이사를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리하는 데에는 6시간이 걸렸어요. 1시간짜리 팟캐스트를 6개 들었거든요. 어 생각해보니 나 이사할 때마다 팟캐스트를 들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에 옮긴 방은 층고가 높아요. 넓어보이고 개방감 있어 보이는 건 좋았지만 높은 층고를 따라 빨래 건조대도 높이 달아놓으면 어쩌자는 걸까요. 제 키가 작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옷 정리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옷장을 제발 하나 더 놓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2023. 12. 23., 경북 포항시 남구 청암로 77 기숙사. 2023. 12. 23., 경북 포항시 남구 청암로 77 기숙사.

그래도 이번 방꾸가 마음에 들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1년 전부터 방 한 구석을 내 취향대로 꾸밀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방을 다 꾸미지 못하더라도 내 손으로 꾸며놓은 부분들을 보고 있으면 행복해지더라고요. 우울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나만의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책 꺼낼 수 있어요. 있다고요.

밤은 벌써 이 도시에

2023. 12. 24., 경북 포항시 남구 효자동길10번길 18.

올해 크리스마스는 부모님과 보내기로 했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정말 오랜만이라서, 사실 거의 처음이라,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했어요.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커들러에서 예약했습니다. 학교 앞에 있는 구움 과자 집인데 사장님이 정말 친절하시고 과자가 맛있어요. 14시 픽업 시간에 맞춰서 가게에 갔는데 사장님께서 정말 열심히 케이크를 실시간으로 만들고 계셨습니다. 먼저 온 손님이 있어서 잠깐 기다렸다가 케이크를 받았어요. 그 길로 본가에 갔습니다. 케이크 걱정하느라 버스에서 잠을 못 잤어요.

2023. 12. 24., 본가 앞.

본가 가는 길에 있는 육교에 자물쇠가 채워져있어요. 한 10년 됐나 그럴겁니다. 제가 채워둔 건 아니지만 여러 생각을 하면서 꼭 잘 있나 확인해봅니다. 언제까지 채워져있으려나. 누가 채워뒀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엄마 아빠는 늦게 퇴근한대요. 전기장판에서 뭉개다가 20시쯤 일어나서 만찬 준비를 했습니다. 스테이크랑 파스타 뿐이었지만 집에서 해서 가족이랑 먹으니까 만찬 맞죠. 스테이크용 고기는 500g 짜리 뉴욕 스트립으로 골라서 집으로 보내뒀었어요. 그냥 올리브유, 소금, 후추로 밑간 했습니다. 따로 더 넣을만한게 집에 없었어요. 고기는 랩으로 감싸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채소들을 손질했습니다. 파스타랑 가니쉬 용으로 쓸 것들이었어요. 손질하는 중에 엄마가 퇴근해서 파스타를 완성해줬어요.

2023. 12. 24., 본가. 2023. 12. 24., 본가.

아빠가 퇴근하는 도어락 소리가 들리자마자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습니다. 스테이크를 구워본 건 이번이 2번째였어요. 작년 크리스마스 때 포터하우스를 호기롭게 시도한게 처음이었는데 대차게 망했었습니다. 두께가 그때랑 비슷해서 이번에도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엄청 잘 나와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얇은 쪽이 약간 질기게 되어서 아쉬웠는데, 대신 두꺼운 쪽이 딱 맛있게 익었더라고요. 30초씩 6분 구웠는데 1분 정도 줄여도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다같이 모여서 특정 날짜에 밥을 먹는 일이 잘 없었던 것 같아요. 엄마가 좋아해서 다행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준비가 늦어져서 결국 저녁은 자정을 넘겨서 먹었어요.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 준비하기 시작해서 크리스마스에 먹었으니 더욱 의미있는 만찬이지 않았을까요.

2023. 12. 24., 본가.

크리스마스에 눈이 온다면

원래는 올해 크리스마스를 가족이랑 보낼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자우림 부산콘이 크리스마스더라고요??? 이번 크리스마스는 부산에서 보내야겠다는 결심이 그 때 섰습니다.

아점으로는 또띠야를 구워서 전날 남은 파스타를 싸먹었어요. 훈제 돼지고기를 같이 넣어서 먹었는데 맛있더라고요. 아 사진찍어둘걸.

콘서트장은 벡스코 오디토리움이었습니다. 전기장판에서 뭉개다가 이르게 출발했어요. 서부산 시민에게 센텀시티는 너무 멀다!!! 지하철 타고 한 1시간 걸렸어요. 그 사이에 친구들이 트리에 적어준 메시지들을 확인했답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2선이 아래와 같음.

https://github.com/betarixm에도 스타 많관부 https://github.com/betarixm에도 스타 많관부

자우림 부산콘은 너무너무너무너무 재밌었어요. 이거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글은 따로 떼려고요.

(아마 여기 쯤 링크가 생길 예정… 응 진짜 언젠가 응응)

2023. 12. 25., 본가.

콘서트 끝나고 바로 집에 들어가기가 아쉬워서 오래간만에 범일을 갈까 전포를 갈까 고민하다가 전포역에서 내려서 괜찮은 바가 있으면 술이나 한 잔 하고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한 두 바퀴 둘러봤는데 성에 차는 바가 없어서 그냥 집에 가기로 했어요. 대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뭉텅이로 사다가 남은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비벼 먹었습니다. 화요도 같이 마셨어요.

아빠가 단 걸 좋아하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가족이랑 맛있는 것도 먹고, 자우림 콘서트도 가고 꽤나 즐거웠던 크리스마스를 보냈어요. 2학기 내내 너무 바빠서 신경질적이고 예민했던 것 같은데 푹 쉬고 잘 노니까 나아지더라고요. 여러 활동을 하면서 즐거웠다기보다, 기분이 처지지 않은 상태로 그것들을 즐길 수 있었다는 점이 더 행복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를 위해 준비한 것들이 나에게 오롯이 전달되어 한결 더 따뜻한 크리스마스였습니다.


권민재

WWW 사이버디지탈 COM